역사 (헤로도토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역사》는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31년에서 425년 사이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작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성립과 성장,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다룬다. 9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은 무사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1권에서 6권까지는 리디아의 크로이소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가 패퇴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7권에서 9권까지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침공 시도를 중심으로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거쳐 페르시아의 패퇴와 아테네 제국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리스 산문 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동서 분쟁의 관점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서술 방식을 통해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려 했으며, 신화, 전설, 민담 등 구전 자료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했다. 그의 저작은 정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양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 소설에도 영감을 주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리스-로마 민족지 - 아이티오피아
아이티오피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어 "불타는 얼굴" 또는 "적갈색"을 의미하며,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고대에는 누비아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 이남의 특정 지역을 가리켰으며,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묘사하며 문화와 자원에 대해 기록했다. - 그리스-로마 민족지 -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통해 알려져 있으며, 이 기록은 르네상스 시대 재발견 이후 독일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쳤지만, 기록의 정확성과 민족주의적 이용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아나바시스》는 크세노폰이 키루스 2세의 왕위 찬탈 원정과 쿠낙사 전투 후 그리스 용병 만 명의 귀환 여정을 기록한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 군사와 소아시아에 대한 사료이며, 명료한 문체로 학습 교재 및 다양한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크세노폰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고대 아테네 출신의 군인이자 역사가, 작가, 철학자로, 《아나바시스》를 통해 페르시아 원정에서의 용병 지휘 경험을, 《헬레니카》를 통해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를 기록했으며, 《키로파에디아》에서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쳐 역사, 정치, 철학, 군사 분야에 걸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5세기 역사책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서술하여 서양 역사 서술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큰 영향을 미친 미완의 역사서이다. - 기원전 5세기 역사책 - 춘추공양전
《춘추공양전》은 《춘추》의 주석서로서, 문답 형식으로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를 풀이하여 문자의 운용에 따른 의미 차이와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 공자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담았다고 주장하며, 춘추좌씨전, 춘추곡량전과 함께 춘추삼전으로 불린다.
역사 (헤로도토스) - [서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제목 | 역사 |
원어 제목 | Ἱστορίαι (히스토리아이) |
저자 | 헤로도토스 |
언어 | 고대 그리스어 |
국가 | 그리스 |
장르 | 역사 |
출판 정보 | |
출판사 | 다양함 |
최초 출판일 | 기원전 430년경 |
2. 구성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25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며,[85]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아 정연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85]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역사》를 9권으로 나누고, 각 권에 학예의 여신 무사(Muses)들의 이름을 붙였다. 각 권의 제목은 순서대로 클레이오, 에우테르페, 탈레이아, 멜포메네, 테르프시코레, 에라토, 폴리힘니아, 우라니아, 칼리오페이다.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립과 성장 과정을 다룬다.[85]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Lydia)의 크로이소스(Croesus : 595 BC~546 BC)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 講)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85] 7권에서 9권까지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시도를 중심으로, 테르모필레 전투(제 22강), 살라미스 해전(제 24강)을 거쳐 페르시아의 패퇴와 아테네 제국의 수립(제 28강)으로 이어진다.[85]
《역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79년)을 동서분쟁의 관점에서 다룬 그리스 산문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85]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사실을 시가(詩歌)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85]
헤로도토스는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직접 청중 앞에서 낭독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역사》 9권은 각기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낭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주요 내용
3. 1. 제1권 (클레이오)
이오, 유로파, 메데이아의 납치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하도록 유도했으며, 그 후 일어난 트로이 전쟁은 아시아와 유럽 민족 간의 갈등의 전조로 여겨진다.[2]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갈등의 원인과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의 업적을 기록하여 인간의 역사가 잊히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고 밝혔다.
리디아의 통치자들은 서해안(오늘날의 터키)에 위치했으며, 칸다울레스, 기게스, 아르디스, 사디아테스, 알리아테스, 크로이소스 순으로 이어진다. (–7) 칸다울레스는 자신의 경호원인 기게스에게 아내의 나체를 보도록 하였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자 아내는 기게스에게 칸다울레스를 죽이거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라고 명령했다. 기게스는 칸다울레스에게서 왕국을 빼앗았다. (–13) 가수 아리온은 돌고래를 타고 구출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24)
솔론은 크로이소스의 질문에 텔루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33) 크로이소스는 아들 아티스를 보호하려 했지만, 아들은 아드라스토스의 실수로 죽게 되었다. (–44) 크로이소스는 신탁을 시험하기도 했다. (–54) 델포이 신탁은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 거대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참주로서 부상하고 몰락했다. (–64) 스파르타는 부상했다. (–68)
아나톨리아의 여러 부족, 카파도키아인, 마티에니, 프리게아인, 파플라고니아인 등의 지리적 위치가 설명되어있다. () 할리스 전투에서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예언했다. () 크로이소스는 키루스 2세에게 패배하고, 이후 키루스의 고문이 되었다. (–92) 티르레니아인은 리디아인에서 기원했는데, 이들은 제비를 뽑아 스미르나로 가서 배를 만들고 생계와 나라를 찾아 항해하여 움브리키에 이르러 도시를 세우고 살았다. 그들은 왕의 아들 이름을 따서 티르레니아인이라고 불렀다.[3]
메디아의 통치자들은 데이오케스, 프라오르테스, 키악사레스, 아스티아게스, 키루스 2세 순이다. (–144) 데이오케스는 메디아 지배를 시작했고,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를 제거하려 했으나 키루스가 권력을 잡았다. 하르파구스는 속아서 아들을 먹게 되었고, 키루스를 도와 아스티아게스에게 복수했다.
페르시아의 문화, 이오니아의 역사와 지리, 하르파구스의 이오니아 공격, 팍튀에스가 리디아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한 내용, 아시리아의 문화, 특히 바빌론 도시의 설계 및 개선, 그리고 그 주민들의 방식, 키루스의 바빌론 공격, 특히 긴데스 강에 대한 복수와 도시 진입을 위한 그의 유명한 방법, 키루스의 비극적인 마사게타이 공격, 그리고 그의 죽음등이 기술되어있다.
헤로도토스는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이 남쪽 멀리 녹는 눈의 결과라고 전하며, 아프리카에 어떻게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63] 그는 페니키아 선원들이 아프리카를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오른쪽에 해를 보았다"고 보고했으나, 남반구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인도에 대한 기록은 외부인에 의한 인도 문명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64][65][66]
3. 2. 제2권 (에우테르페)
헤로도토스는 제2권 에우테르페에서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과 프삼메티크 3세의 패배를 다루고, 이집트의 지리, 문화, 종교, 풍습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5] 특히 나일 강의 범람과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다루는데,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이 남쪽 멀리 녹는 눈의 결과라고 언급하며, 아프리카에 어떻게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63]
이집트의 종교 관습은 그리스와 다른 점이 많았으며,[5] 이집트인들은 고양이, 개, 악어, 하마, 수달, 불사조, 신성한 뱀, 날개 달린 뱀, 따오기 등 다양한 동물을 신성시했다.[5] 이집트 문화에는 의학, 장례 의식, 음식, 보트 등이 포함된다.[5]
메네스부터 아마시스 2세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왕들(파라오)과 그들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니토크리스, 모에리스, 세소스트리스, 페론, 프로테우스 등 여러 왕이 언급된다.[5] 트로이 전쟁 직전, 헬렌과 파리스가 이집트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6]
람프시니트와 영리한 도둑 이야기, 케옵스와 기자의 대 피라미드 건설, 케프렌, 미케리누스, 사바코스 등 여러 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한다.[5] 또한, 미궁과 사제의 계보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5]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 선원들이 아프리카를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오른쪽에 해를 보았다"고 보고했는데, 남반구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63]
3. 3. 제3권 (탈레이아)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2세의 아들이자 페르시아의 왕으로 이집트를 공격하여 이집트 왕 프삼티크 3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캄비세스의 에티오피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광기에 휩싸였다.
사모스의 왕 폴리크라테스는 행운을 누렸지만, 사르디스 총독 오로이테스의 계략에 빠졌다. 코린토스와 코르키라의 왕 페리안드로스와 그의 완고한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두 마기의 반란이 일어났고, 캄비세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일곱 명의 음모자들은 마기를 제거하고 다리우스 1세를 왕위에 올렸다.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스무 개의 사트라프로 나누어 통치했다.
인도에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금을 채취했고, 아라비아에서는 향신료를 채취하는 방법이 발달했다.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조피로스의 계략으로 진압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바빌론을 방문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3. 4. 제4권 (멜포메네)
다리우스 1세의 스키타이 원정과 그 실패 과정을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스키타이인(흑해 북쪽 지역)의 역사, 스키타이의 지리, 종교, 장례 의식, 외국인 혐오증(아나카르시스와 스킬라스의 이야기), 인구 등 문화와, 주변 민족들의 풍습이 소개된다. 타우리, 아가티르시, 네우리, 안드로파기 (식인종), 멜란클라이니, 겔로니, 부디니, 사우로마테등의 주변 민족의 풍습을 다룬다. 특히, 스키타이에 의한 아마존 유혹과, 사우로마테 형성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다리우스의 스키타이 공격의 시작과, 보스포루스 해협에 놓인 부교에 대한 내용, 게타이의 잔혹한 잘목시스 숭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또한, 다리우스의 스키타이 공격 실패와 후퇴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
리비아(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대륙의 지리적 특징을 비교한다.[63] 특히, 페니키아 선원들이 아프리카를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오른쪽에 해를 보았다"고 보고했으며, 남반구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헤로도토스는 말했다. 그의 인도에 대한 기록은 외부인에 의한 인도 문명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64][65][66]
스키타이 너머 지역의 주민들로 사우로마테, 부디니, 티사게타이, 아르기파이, 이세도네스, 아리마스피, 히페르보레오스등이 소개된다.
미냐이(아르고나우트의 후손)의 이야기와 키레네 건국과정과, 키레네의 왕들의 통치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투스 1세, 아르케실라우스 1세, 바투스 2세, 아르케실라우스 2세, 바투스 3세 (및 데모낙스의 개혁), 아르케실라우스 3세 (및 그의 도주, 복귀, 암살), 바투스 4세, 아르케실라우스 4세 (그의 반란과 죽음)와 마지막으로 아르케실라우스의 어머니 페레티마의 복수 이야기가 나온다.
3. 5. 제5권 (테르프시코레)
메가바주스(영어판)가 트라키아인을 공격하고, 파이오니아인을 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페르시아 사절단을 학살했다.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인 공격에 실패한 후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기원전 499년)
클레오메네스 1세와 그의 이복 형제 도리에우스 등 스파르타 왕들의 배경이 설명된다. 페르시아 왕의 길이 사르디스에서 수사까지 이어져 있음이 기술되고, 페니키아인이 그리스에 문자를 도입했음이 언급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해방시켰으나, 이후 아테네를 공격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 부족을 재편성했고, 테베인과 아이기나가 아테네를 공격했다. 코린토스의 참주 킵셀로스와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에 대한 배경이 설명된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아테네에서는 지원을 얻는 데 성공했다. 사르디스가 방화되고, 다리우스는 아테네인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려 시도했다.
3. 6. 제6권 (에라토)
히스티아이오스는 키오스로 도주하였고, 포키아의 디오니시우스는 이오니아 함대를 훈련시켰으나, 전투 중 사모스인들이 이오니아 함대를 포기하면서 페르시아에 패배하였다.[7] 하르파고스는 히스티아이오스를 잡아 죽였다.[7]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영토를 침략하여 마케도니아를 노예화했으나, 아토스 산 근처에서 함대 선박 300척이 파괴되었다.[7] 다리우스는 그리스인에게 흙과 물을 제공하라고 명령했고, 아이기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이에 동의하였다.[7] 아테네는 반역자 처리에 대한 클레오메네스 1세 스파르타의 지원을 요청했다.[7] 스파르타가 두 명의 왕을 갖게 된 배경과 그들의 권한이 설명되었고, 가짜 혈통으로 추정된 데마라투스는 폐위되었다.[7] 클레오메네스와 레오티키데스는 아이기나의 반역자를 체포했다.[7] 클레오메네스는 아르고스와의 전쟁, 혼합되지 않은 포도주 음주, 또는 데마라투스 폐위에 관여한 것 때문에 광기 속에서 자살했다.[7] 이후 아이기나와 아테네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7]
에레트리아인들이 아테네의 지원을 거부한 후 페르시아인에 의해 에레트리아가 점령되었다.[7] 페이디피데스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가던 중 판 신과 조우했다.[7] 플라타이아인은 아테네를 지원했고, 밀티아데스와 다른 ''스트라테고이''가 이끈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는 승리했다([https://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1.0126%3Abook%3D6%3Achapter%3D100%3Asection%3D1 이 부분은 대략 6.100부터 시작됨]).[7] 스파르타는 늦게 아테네 지원에 도착했다.[7] 알크마에오니다이의 역사와 그들이 부와 지위를 얻게 된 경위가 설명되었다.[7] 파로스 공격 실패 후 밀티아데스는 죽었고, 렘노스 점령에는 성공했다.[7]
; 이오니아 반란 (1-42)
디오뉘시오스는 이오니아 해군을 훈련시켰고(11-12), 기원전 493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했다(31-42).[7]
; 마르도니오스에 의한 그리스 본토 공격 (43-45)
기원전 492년 폭풍우로 인해 첫 원정군은 철수했다.[7]
; 다티스다티스/Datis영어 및 아르타페르네스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 (son of Artaphernes)영어에 의한 그리스 본토 침입 (46-140)
기원전 490년 아테나이인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했고(103-131),[7] 스파르타인은 늦게 마라톤에 참전했다(120).[7]
3. 7. 제7권 (폴리힘니아)
다리우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후, 페르시아는 군대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아들 중 누가 다리우스의 뒤를 이을 것인지를 두고 아리아비게네스와 크세르크세스 사이에 다툼이 있었으나, 결국 크세르크세스가 선택되었다.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가 죽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이집트 반란을 진압했다.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에 대해 마르도니우스는 적극적으로 침공을 주장한 반면, 아르타바누스는 반대했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꿈에서 유령의 위협을 받고 결국 침공을 결정하게 된다.
크세르크세스는 크세르크세스 운하 건설과 헬레스폰트 해협을 가로지르는 크세르크세스의 부교 건설 등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 피티우스는 크세르크세스에게 모든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에게 보상했다. 그러나 피티우스가 아들 한 명을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크세르크세스는 분노하여 피티우스의 아들들을 갈라놓고 그 사이를 행진하게 했다. 고대 이집트인과 페니키아인들이 아비도스에 건설한 다리가 파괴되자, 다시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테살리아, 테베, 멜리아, 고대 아르고스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 국가들이 페르시아 편에 섰다. 시라쿠사의 젤론은 협상 후 지원을 거부했고, 크레타 역시 지원을 거부했다. 폭풍으로 인해 페르시아 선박 400척이 파괴되기도 했다.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약 7,000명의 소규모 그리스 군대는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지연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리스 군대는 3일 동안 협곡을 지켰으나, 에피알테스가 비밀 통로를 누설하고, 히다르네스 2세가 이 통로를 이용하여 산을 돌아 그리스 군대를 포위했다.
스파르타인, 테스피아이, 테베인들을 제외한 모두가 후퇴했고, 테베인들은 스파르타인들에 의해 강제로 남겨졌다. 결국 그리스는 패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의 머리를 자르고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명령했다.
3. 8. 제8권 (우라니아)
기원전 481년 이스트모스 회의 이후 그리스 함대는 스파르타 사령관 에우리비아데스가 지휘하였다. 그리스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파견된 200척의 함선은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그리스 함대는 후퇴하였으며, 델포이는 페르시아의 공격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원받았다. 함대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가 철수하였다. 살라미스 섬에서 그리스 함대가 증강되어 총 378척이 되었다. 아테네에 남은 자들과의 어려움 끝에 페르시아 육군은 아테네를 파괴하였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인들은 더 나은 조직력과 수영 능력으로 인한 적은 피해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앙가룸(페르시아의 역참)에 대한 설명이 언급된다. 페르시아 여성 사령관 아르테미시아의 총애가 높아지고, 페르시아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며 크세르크세스에게 조언하였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수석 환관인 헤르모티무스가 파니오니우스에게 복수하였다. 아테네 함대 사령관이자 살라미스에서 가장 용감한 그리스인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안드로스를 공격하였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도주하고 테살리아에 마르도니우스 휘하의 정예병 30만 명을 남겨두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의 조상,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1세가 언급된다. 알렉산더 1세가 아테네와 페르시아 동맹을 맺으려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원정(1-129)과 관련하여, 아테나이 시민의 탈출(23-55)과 살라미스 해전(56-96)이 있었다.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육군은 테살리아에서 월동하였다.(130-144)
3. 9. 제9권 (칼리오페)
마르도니우스는 비어 있던 아테네를 두 번째로 점령했다. 라케다이몬 군대가 파견된 후, 마르도니우스는 테베로 피신했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기병대장 마시스티우스를 살해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리스인들에게 임박한 공격을 경고했다. 아이엠네스투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를 죽였다. 페르시아군은 테베로 후퇴했다가 학살당했다. 전투 후 전리품이 분배되었다. 아르타바조스 1세는 아시아로 빠르게 탈출했다.
그리스 함대는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했고(미칼레 해전), 이오니아는 반란을 일으켰다. 크세르크세스의 아내 아메스트리스는 마시스테스 아내의 신체를 훼손하라고 명령했다. 마시스테스는 반란을 꾀한 후 죽임을 당했다. 아테네는 세스토스를 봉쇄하고 아르타이케테스를 포획했다. 페르시아인들은 키루스에게 바위가 많은 페르시스에서 이주할 것을 제안했으나 실패했다.
4.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 방식과 신뢰성
4. 1. 역사 서술 방식
헤로도토스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을 넘어, 여러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설명하려 했다.[19] 그는 사건의 이유나 원인을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는 그의 저서 ''역사'' 서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19] 그는 다양한 잠재적 원인과 감정을 다루었으며, 감사와 복수의 의무를 인간 행동의 기본적인 동기로 보았다.[22]헤로도토스는 이전의 산문 저술가들보다는 시인과 이야기꾼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8] 특히 호메로스의 영향이 컸는데, 그는 호메로스처럼 방랑하는 음유 시인들의 구전 시 전통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수집하고 해석했다.[18] 이러한 구전 역사에는 민담, 지리, 인류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헤로도토스는 이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엮어냈다.[18]
그는 신화, 전설, 민담 등 구전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예를 들어, 아리온과 돌고래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야기의 진실성을 주장하기 위해 "코린토스와 레스보스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같이한다"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80]
헤로도토스는 지리, 문화, 풍습,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루어, 당시 사회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의 크기가 동일하다는 기존의 이론에 반박하며 대륙의 비대칭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다뉴브 강과 나일 강에 대한 대칭적 개념과 같이 이상화하는 경향도 보였다.[14]
헤로도토스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고,[74] 때로는 여러 설명 사이에서 중재하기도 했다.[75] 그는 "나는 이러한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겠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인에 대한 잘못을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을 지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기도 했다.[75] 그는 델포이인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언급하며 "나는 델포이인들로부터 직접 들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76]
그는 인간사에 대한 설명에 신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들이 신들이 인간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IX, 100)라고 말하며 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신적 존재와 인간적 행위자를 상호 연관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호메로스 이후의 일반적인 그리스 사상과 일치한다.[24]

4. 2. 신뢰성 논란
헤로도토스의 저작의 정확성은 그의 시대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30] 사모스의 두리스(Duris of Samos)는 헤로도토스를 "신화 장사꾼"이라고 불렀으며,[30] 키케로(Cicero)는 그의 저작이 전설 또는 "우화"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31]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ndrian school)의 문법학자 하포크라티온(Harpocration)은 "헤로도토스의 거짓말"에 관한 책을 썼다.[34]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Lucian)는 ''진실한 이야기''에서 "역사의 아버지"에게 행복한 섬(Fortunate Isles)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투키디데스(Thucydides)의 저작이 "진실성과 신뢰성" 때문에 더 선호되기도 했지만,[35]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의 저작은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많은 고대 및 현대 학자들(예: 스트라보, A. H. L. 헤렌)은 헤로도토스를 정기적으로 인용했다.
일부 학자들은 헤로도토스가 여행 범위를 과장하고 출처를 날조했다고 주장한다.[38] 데트레프 펠링은 헤로도토스가 보고한 많은 이야기의 출처가 믿을 만하지 않으며, 페르시아와 이집트 정보 제공자들이 그리스 신화와 문학에는 부합하지만 자신들의 전통을 알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39]
헤로도토스는 순수한 분석적 역사보다 "흥미로운 사건, 웅대한 드라마, 기이한 이국적 풍물"을 선호하여 특정 구절은 논쟁과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41][42][43][44][45][46][47][48][49][50]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51] 헤로도토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세계,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그의 시대까지 2세기 동안의 더 넓은 지역의 사건에 대한 주요하고 종종 유일한 출처 역할을 해왔다.[52][53] 현대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출처와 인식론적 가치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며,[54] 헤로도토스는 "비교 인류학의 아버지",[52] "민족지학의 아버지",[53] "전체 역사의 이상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다른 어떤 고대 역사가보다 더 현대적"이라고 여겨진다.[54]
19세기 말 이후의 발견은 일반적으로 헤로도토스의 신뢰성을 높였다. 스키타이에 위치한 젤로누스에 대한 묘사는 1975년에 재발견되기 전까지는 널리 믿어지지 않았다. 현재 수몰된 고대 이집트 도시 헤라클레이온의 고고학적 연구와 "나우크라티스 석비"의 회수는 헤라클레이온이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건설되었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을 방문했다고 주장했지만, 바빌론의 공중 정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의 신뢰성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댈리는 공중 정원이 바빌론이 아닌 니네베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48] 헤로도토스가 쓴 이집트에 관한 기록의 신뢰성은 때때로 의문을 받는다.[50] 앨런 B. 로이드는 헤로도토스의 저술을 역사적 문서로서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부적절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했다고 주장한다.[44]
그러나 수몰된 이집트 항구 도시 토니스-헤라클레이온의 발굴 과정에서 ''역사''에 묘사된 바리스가 최근 발견되면서 헤로도토스의 여행과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56]
셰이크 안타 디오프는 헤로도토스가 "그의 시대에 꽤 양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며,[58] 마틴 버날은 ''블랙 아테나''에서 헤로도토스에게 "극도로 의존"했다.[60] 영국 이집트학자 데릭 A. 웰스비는 "고고학이 헤로도토스의 관찰을 생생하게 확인해준다"고 말했다.[61]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의 악의에 관하여''에서 헤로도토스에 대한 "중상적인 허구"를 담아, 헤로도토스가 테베에 편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69] 디오 크리소스토모스는 ''코린토스 연설''에서 역사가가 코린토스에 편견을 가졌다고 비난했다.[70] 헤로도토스는 귀족이나 사제와 같은 공동체 내 권력자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습관이 있었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가 그리스 사건에 대한 그의 주요 정보원이 되어, 그리스 사건에 대한 그의 보고는 종종 경쟁 국가인 테베와 코린토스에 대한 아테네의 편견에 의해 왜곡되었다.[72]
5. 한국적 관점
5. 1. 인물
크로이소스 (1.26-91)는 리디아의 최성기·마지막 왕으로, 부를 자랑했지만 키루스에게 멸망했다. 크로이소스는 화형에 처해질 뻔했지만, 아폴론이 도왔다고 헤로도토스는 적고 있다.키루스 (1.71-214)는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초대 왕이다. 기원전 550년에 메디아, 기원전 547년에 리디아, 기원전 539년에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페르시아를 대제국으로 만들었다.
아마시스아마시스 2세/Amasis II영어 (2.162-3.10)는 이집트 제26왕조 말기의 왕으로, 페르시아가 침략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 프삼메니토스 3세프삼메니토스 3세/Psamtik III영어가 페르시아와 싸워 패배했다.
캄비세스 2세 (3.1-66)는 페르시아 왕이자 키루스의 장남이다. 기원전 525년에 이집트를 정복했으나, 에티오피아 원정에 실패하고 광기에 휩싸여 허벅지 부상으로 죽었다.
다리우스 1세 (3.70-7.4)는 캄비세스 사후의 페르시아 왕으로, 각지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오니아 반란을 계기로 그리스 원정을 시작했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아류안데스 (4.165-203)는 페르시아 치하의 이집트 제27왕조 태수로, 리비아로 원정했다. 다리우스에게 반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히스티아이오스 (5.11-6.30)는 밀레토스 참주였지만, 메가바조스메가바조스/Megabazus영어가 다리우스의 측근으로 추천했다. 다음 밀레토스 참주이자, 사위인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 반란이 진압된 후 처형되었다.
아리스타고라스 (5.30-126)는 밀레토스의 참주이다. 낙소스 섬 점령에 실패하고, 기원전 499년에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아테네를 동맹국으로 만든 것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인의 원인이 된다.
클레오메네스 (5.39-6.84)는 스파르타의 왕이다. 아테네의 민주화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의 추방)에 기여했다. 아리스타고라스의 동맹 요청을 거절했다. 마라톤 전투 이후 발광하여, 감금되어 자살했다.
아르타페르네스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영어 (5.25-6.42)는 다리우스 1세의 이복동생으로, 사르디스의 총독이었다. 즉 대그리스 외교를 담당했으며, 이오니아 반란을 정벌했다. 그 아들의 이름도 아르타페르네스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 (son of Artaphernes)영어이며, 기원전 490년 그리스 전역의 장군(6.94-119)이다.
다티스다티스/Datis영어 (6.94-119)는 페르시아의 장군이다. 기원전 490년의 그리스로의 전쟁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지휘했다. 상륙한 곳,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 패배했다.
밀티아데스 (6.103-136)는 페르시아의 지배지 트라키아에서 아테네로 돌아온 장군이다. 마라톤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했다. 이듬해 파로스 섬 공격에 실패하여 고발당하고, 다리 부상으로 사망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 (7.2-9.116)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페르시아의 왕이다.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로 직접 원정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철수했다.
레오니다스 1세 (7.204-225)는 클레오메네스 1세의 동생인 스파르타 왕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선택한 좁은 곳,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했다.
테미스토클레스 (8.4-125)는 아테네의 평민 출신 정치인이다. 아테네 해군의 육성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을 지도하여 승리했다. 후년에 도편 추방으로 아테네를 쫓겨나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마르도니우스는 페르시아의 장군이자 다리우스 1세의 사위이다. 기원전 492년에도 원정을 했지만, 폭풍으로 군함이 난파되어 퇴각(6.43-45)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친정에서는 페르시아 육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패배, 전사.(8.97-9.64)했다.
파우사니아스 (9.10-88)는 레오니다스 1세의 조카이자 스파르타 국왕의 섭정이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했다. 후년에, 페르시아와의 밀통 혐의로 살해되었다.
5. 2. 사건
5. 3. 국제 관계
6. 영향
헤로도토스는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저술 방식과 내용은 이후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 배리 S. 스트라우스는 헤로도토스를 "글을 쓴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서술 능력이 그를 역사학의 아버지로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동부 지중해와 그 너머를 여행하며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연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history(역사)"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그는 단순한 역사가를 넘어, 동과 서 간의 투쟁, 자유의 힘, 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다루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저술은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그리고 주변 지역의 역사, 문화, 지리 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현대 학문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훌륭하며, 여전히 연구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동과 서 간의 투쟁, 자유, 제국의 흥망성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독자를 페르시아 제국의 부상에서부터 그리스 독립을 위한 전쟁, 그리고 아테네의 확장까지 이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여러 역사 소설에 영감을 주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심하게 화상을 입은 주인공이 『역사』를 닳도록 읽고 개인적인 메모 등을 넣어둔 것으로 묘사된다.
참조
[1]
논문
On Editing Herodotus
https://www.persee.f[...]
1983
[2]
서적
Some demonstrably false source citations
Francis Cairns, Ltd.
1989
[3]
서적
The Histories
http://www.perseus.t[...]
Harvard University Press
1920
[4]
논문
Cleaning symbiosis involving Galapagos tortoises and two species of Darwin's finches
[5]
웹사이트
2,500 Years Ago, Herodotus Described a Weird Ship. Now, Archaeologists Have Found it.
https://www.livescie[...]
2019-03-19
[6]
서적
Homer, poet and histor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7]
웹사이트
Herodotus, The Histories, Book 6, chapter 100, section 1
https://www.perseus.[...]
2017-10-03
[8]
문서
1986
[9]
Herodotus
[10]
문서
Preparation of the Gospel
[11]
문서
1985
[12]
문서
1985
[13]
문서
1972
[14]
문서
1985
[15]
문서
1985
[16]
문서
Antigo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17]
문서
1859
[18]
문서
1986
[19]
문서
2013
[20]
문서
1989
[21]
문서
Iliad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7
[22]
문서
1989
[23]
문서
1989
[24]
문서
1989
[25]
문서
1989
[26]
문서
1989
[27]
문서
1989
[28]
문서
1989
[29]
문서
1989
[30]
문서
2001
[31]
문서
2011
[32]
문서
1998
[33]
문서
2007
[34]
문서
2004
[35]
문서
The Anti-Thucydides: Herodotus and the Development of Modern Historiography.
Brill, Leiden and Boston
2016
[36]
서적
Herodotus and His Successors: The Rhetoric of the Persian Wars in Thucydides and Xenophon.
Brill
2016
[37]
논문
1994
[38]
논문
1989
[39]
논문
1989
[40]
논문
2000
[41]
논문
2010
[42]
논문
2002
[43]
논문
2010
[44]
논문
1993
[45]
논문
1994
[46]
논문
1997
[47]
논문
2001
[48]
논문
2003
[49]
논문
2010
[50]
논문
2013
[51]
논문
2003
[52]
논문
1972
[53]
논문
1996
[54]
논문
1986
[55]
논문
1994
[56]
웹사이트
Wreck of Unusual Ship Described by Herodotus Recovered From Nile Delta
https://www.smithson[...]
[57]
논문
1838
[58]
논문
1981
[59]
논문
1974
[60]
서적
Herodotus and the Origins of the Political Community: Arion's Leap.
Yale University Press
1996
[61]
논문
1996
[62]
논문
2002
[63]
뉴스
Herodotus on the First Circumnavigation of Africa
https://www.livius.o[...]
2019-06-12
[64]
서적
The Indian Empire
https://dsal.uchicag[...]
Digital South Asia Library
1909
[65]
서적
The India They Saw: Foreign Accounts
https://books.google[...]
Prabhat Prakashan
2011-01-01
[66]
서적
The Classical Accounts of India: Being a Compilation of the English Translations of the Accounts Left by Herodotus, Megasthenes, Arrian, Strabo, Quintus, Diodorus, Siculus, Justin, Plutarch, Frontinus, Nearchus, Apollonius, Pliny, Ptolemy, Aelian, and Others with Maps
https://archive.org/[...]
Firma KLM
[67]
논문
1984
[68]
뉴스
Himalayas offer clue to legend of gold-digging 'ants'
https://www.nytimes.[...]
2016-02-23
[69]
논문
1859
[70]
웹사이트
Dio Chrysostom Orat. xxxvii, p. 11
https://penelope.uch[...]
Penelope.uchicago.edu
2012-09-13
[71]
서적
Life of Thucydides
[72]
서적
1972
[73]
서적
1985
[74]
서적
2013
[75]
서적
2013
[76]
서적
2013
[77]
서적
2013
[78]
서적
2013
[79]
서적
1960
[80]
서적
Histories
[81]
서적
1998
[82]
서적
1998
[83]
서적
岩波文庫
1971
[84]
서적
岩波文庫
1971
[85]
백과사전
헤로도토스 [Herodotos]
네이버 지식백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